삼국지에서 여러 전투가 있지만 흔히들 적벽대전을 손꼽습니다.
나관중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겠지만, 정사와 비교해보면 좀 터무니 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삼국지연의....
연의(演義)란 무슨 뜻일지 다시 생각해보면...
연(演)은 '발전시켜 풀어낸다는 뜻이고
의(義)는 유가 사상의 도리의 뜻이죠.'
합쳐서 다시 쉽게 말하면, 유가 사상의 도리를 발전시켜 풀어낸다는 뜻이죠.
연의 앞에 삼국지를 붙인건 유가경전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위촉오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시 재조명하여 소설로 풀어냈기 때문에 삼국지 '연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장편소설로 풀어내고, 유가에서 강조하는 정통 관념, 충효관념을 곳곳에 삽입하다보니 조조가 아주 나쁜이미지로 부각되고, 관우는 의리있는 사람으로,
유비는 정통관념이 작용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부각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조조의 문학 작품을 살펴보면, 정말 간사하고 의리없고, 나쁜사람인지 의아하게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조조의 작품을 읽어보고 감상해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쳔차가 심한것을 보며, 진실과 허구의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진상을 파악하기 힘든가에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조조..그의 개성이 가장 잘 들어나는 대표적 작품
단가행(短歌行)중 앞부분을 살펴볼께요.
譬如朝露,去日苦多。
慨当以慷,忧思难忘。
何以解忧?唯有杜康。
술을 대하면 노래를 불러,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인생은 아침 이슬 같아, 회고하면 고생만 생각나.
절로 나오는 감개무량. 근심 걱정 잊을수 없어.
어떻게 근심을 풀거나, 오로지 술이로다.
심각한 인생의 문제를 술로 푼다는 식의 퇴폐적인 각도에서 접근하는 듯 하더니
곧 이어 표표히 방향을 바꿔 현생의 인생에서 인재를 발탁하고 아껴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볼 수있네요.
青青子衿,悠悠我心。
但为君故,沉吟至今。
....
明明如月,何时可辍。
忧从中来,不可断绝。
越陌度阡,枉用相存。
契阔谈宴,心念旧恩。
푸르디 푸른 그대의 옷깃, 내 마음 한없이 이어져
나 바로 그대 때문에,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네.
.....
밝디밝은 저 달님을, 언제 올라가 따낼거나?
근심이 가슴 적시며, 끊기지 않는구나
멀고 먼 길 달려와, 왕림해주셨으니.
오랜만에 회포풀며, 옛정을 나누노라.
이렇게 인재를 갈구하는 심정을 피력하고 나서, 그제서야 자신의 포부를 밝힙니다.
月明星稀,乌鹊南飞。
绕树三匝,何枝可依?
山不厌高,水不厌深。
周公吐哺,天下归心。
달 밝고 별 드문데, 까마귀는 남쪽으로
나무는 세 바퀴 돌아, 어느 가지에 앉을쏘냐.
높은산 흙을 모아서고, 깊은 물은 물줄기 합친 것.
주공은 식사중에 반갑게 손님 맞이하여
천하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았다지.
또한, 전쟁에 관한 정사적 기록은 희박합니다.
아래는 삼국지 원문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아주짤막하게 적벽에 대해 서술되어있네요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선 적벽대전에서 왜 조조가 유비에게 졌을까 생각해보면,(제 개인적 의견임돠)
1. 조조는 전략적인 목표가 불분명했다.
유비를 제거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유비 제거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즉 장판교 싸움 이후에 유비 - 손권 동맹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2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불구하고, 조조는 병사를 움직여서 유비를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았죠. 조조는 그냥 2달동안 강릉에 머물면서, 민심을 잡는데 급급했다는 점.
2. 젋은 피에 슬슬 늙게 시작한 조조가 졌다는 것!
당시 주인공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손권 27, 제갈량 27, 주유 34, 노숙 37, 유비 47, 이들 평균나이는 34
54살인 조조보다도 20살 어린 젊은 이들이었다는 것..
적벽대전 이 전투로 인해 삼국이 나뉩니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83만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과장입니다. 실제로는 약 10만군대 정도에 해당하고 유비,손권 연합은 약 3만~4만의 군대에 대항합니다. 조조는 적벽에서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리자 배를 불태우고 퇴각합니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바람을 일으키고 주유,황개와 조조의 머리싸움이 전개되지만 이런것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퇴각한 조조가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하는것 역시 거짓이지요.
적벽대전은 삼국시대를 결정지은 대규모 전투가 아니라 소규모의 국지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의견의 근거는 <삼국지> '제갈양전' 에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曹操의 병력은 5천뿐이었으며 그것도 300여리를 강행군해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5천의 군대로 5만의 군대를 상대해야 하니 당연히 적수가 되지 못했고 그러므로 그 전투는 당연히 소규모 전투라고 보아야 합니다.
일리 있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조조가 실제로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왔다면 주유가 3만의 인마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을 때 유비는 왜 '병력이 적은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했을까요? 또한 <삼국지> '주유전'에서는 "조공이 형주로 진입하자 유종은 모든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조공은 그 수군을 얻게 되어 수군과 보병의 수가 도합 수십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조의 군사는 분명5천 이상이었으며 다만 정확히 몇 십만인지를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이렇듯 역사는 쉽게 작은 것을 크게 확대시키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적벽에서 조조는 패했습니다. 그것이 상대편의 완벽한 계책 때문이었는지 역병에 의한 아군의 체려 저하 탓이었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의 의미와 영웅의 기개일 것입니다.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조조는 화용도에서 벗어난 후 웃었다고 합니다. "유비가 좋은 적수이긴 하지만 그 동작이 느린 것이 애석하다. 만약 화용도를 막고 불을 놓았다면 그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실제 조조가 지나가고 얼마 후 유비는 화용도에 와서 불을 놓지만 조조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웅의 마음, 조조가 적벽에서 웃었듯이 우리 또한 삶의 좌절 앞에서 웃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찌되었던간에, 중국에서는 품삼국(品三國) 책으로 인기몰이 했던
역중천(易中天)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도올처럼 작년에 삼국지로 휘몰이를 한바탕
하였습니다.
그가 강의했던 적벽대전의 내용인데 40분 분량의 강의인데 혹시 관심 있는분은
재생하셔서 보셔용..ㅋㅋ(역중천 싫어하는 사람도 상당하고 좋아하는사람도
참 많은듯...)
그리고 영화 적벽대전 내용을 자세히 보시려면..http://www.redclif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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