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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灣

같은 일제 식민지, 다른 반응 : 대만은 왜 일본에게 우호적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8. 15.

 오늘은 67주년 광복절이다.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일제의 식민지로 있었던 대만의 광복절은 10월25일이고 우리와 달리 국경절은 아니다.

대만은 일본 이전에 국토의 일부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기도 하다.

송, 원 이후로 중국 복건성 일대의 주민들이 대만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명이 망하면서 반청복명 운동을 하던 한족들이 복명 운동에 실패하고 대만으로 건너와 대만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내쫓으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에 들어오게 된다. 

중국은 이 사건을 대만의 첫번쨰 광복이라고 주장하고 본래는 원주민들의 땅이던 대만을 중국의 영토 일부분으로 편입시킨다.

1895년 중일갑오전쟁의 결과 중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중국에선 馬關條約, 일본에선 下關條約)을 맺게 되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였으며, 이 때부터 대만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대학 때 교환학생으로 대만에 처음 갔을 때, 학교에서 "대만사"라는 과목을 수강했었다.

대만의 역사지만 대만인들 보다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되어진 대만 역사. 당시 수업 교재는 일본인이 쓴 책이었다. 담당 교수님이 일본에서 유학하신 분이라 그 영향도 조금 있었던거 같다.

그 학교는 본래 교환학생이 일본 학생 위주고 매 학기 일본 자매 학기에서 한 반의 학생들이 오고 그 반 아이들을 위한 특별 시간표가 짜여져 있으며 수업도 일문과 교수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살던 외국인 기숙사도 일본 학교에서 지어준거라 그 학교의 이름을 따고 있었으며 교환 학생의 70퍼센트가 그 학교 학생이었으며 일본 이외 국가 학생은 10퍼센트 정도. 

그러다보니 그 학교 외의 학생들은 중국어 기초도 없어 시내에 있는 랭귀지 스쿨로 따로 수업을 들으러 가는 애들을 제외하고는 그 일본반 수업과 대만 학생들과의 대학 정규 수업 과정을 병행해서 들어야 했다. 그 수업에서 우리는 소수에 불과했고 교수님들은 일본애들 위주로 수업하고 일본어로 번역을 시키거나 일본어로 다시 설명해주는 교수님도 있어서 프랑스 아이가 교수님과 싸우기도 했었다. 학교 내에서 느낀 것도 있었지만 대만 생활을 하면서 대만 사람들은 일본인들에게 참 우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을 처음 갔을 2001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와 대만은 직항도 없었고 한국 관광객도 소수에 불가했으며 이제 막 "가을 동화", "불꽃"같은 드라마들이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던 시기였다. 우리보다 한 학기 먼저 온 다른 학교 오빠가 우리 보고 너네는 참 때를 잘 맞춰서 왔다면서 자기네는 애들이 아무 관심도 없어서 힘들었다고 행복한 줄 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만 티비는 일본 드라마로 넘쳐나고 케이블에는 일본 전용 채널이 3,4개나 되고 거리에는 일본 음반, 일본 드라마 DVD, 일본 스타일의 옷 등 각종 일제가 넘쳐나고 대만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 일본인일 정도로 일본인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정신없이 보내던 첫 학기가 지나고 두번째 학기 때 "대만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왜 같은 일제 식민지였는데 대만 사람들은 일본에게 우호적일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고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중 다른 학교 한국인 아이와 함께 교수님께 질문을 했다.

 


교수님의 대답은

 

1. 대만과 한국의 식민 통치 시작 시기가 달랐다.

대만을 일본이 통치할 당시, 일본은 아직 근대화가 시작되지 않았었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일본은 대만에서 먼저 테스트를 한 후, 일본에 적용을 하였다. 그래서 일본보다 먼저 대만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건 일본이 참 많이 하는 말이다. 우리가 너네를 근대화 시켜줬다. 우리가 철로도 깔아주고 길도 닦아주고 그러지 않았냐고.. 근데 왜 그걸 했나? 자기네들 전쟁하려고 그리고 더 편하게 빨리 수탈한 물건들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는데...

 

2. 대만 주민에 대한 탄압이 적었다.

 한국은 한민족으로 구성되어 오랜 세월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오고 있었으나 당시 대만은 국가의 개념으로 보기 힘들었다. 당시 대만에 있던 한족들은 그들의 원래의 생활만 보장된다면 누구의 통치를 받던 상관 없다고 여겼다.

 

 여기서 대만과 우리나라가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 나라는 단일 민족 국가로 오랜 시간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오고 있었으며 나라라는 개념이 강했었다. 하지만 대만은 본래 원주민들(필리핀 등 동남아에서 이동해 온 것으로 추정)의 땅이었으나 중국의 한족들이 건너오면서 원주민들은 점차 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이전에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기도 하였으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까오시옹과 타이베이가 한 나라에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반청복명 운동을 하다 실패하고 쩡청공(鄭成功)이 대만으로 들어와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대만을 지배하였으나 쩡청공이 죽고 청에게 패해 대만은 청에 복속된다. 이를 근거로 중국은 대만이 자기네 땅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청은 대만에게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전쟁에서 패하자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면서 대만을 일본에 넘긴다. 대만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때 대만 땅의 주인은 여러번 바뀌었고 그들의 생업만 보장이 된다면 상관이 없다고 여겼으며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도 적었다. 대만의 대표적 항일 운동 北埔事件, 霧社事件도 원주민이 주도한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중국에서 건너오는 한족들에 의해 비옥한 땅을 빼앗기고 점점 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대만을 점령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금수만도 못하게 여겼으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였다.


 그 중 우써사건(霧社事件)은 1930년 대만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반일 항쟁이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시디그 발레》(賽德克·巴萊)라는 영화는 작년 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의 창" 섹션에서 상영되었다. 시디그 발레는 대만 웨이더썽(魏德聖) 감독의 작품으로, 시디그 발레는 아타얄족(賽德克族)어로 좁은 의미로 아타얄족을 지칭하고, 넓은 의미로 진정한 사나이, 용감한 자, 우수한 자, 문무를 겸비한 자 등이다. 《시디그 발레》는 상《太陽旗》와 하《彩虹橋》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편은 일본 국기의 상징인 타이양치(太陽旗)를 편명으로 하여 1895년 일제의 대만 점령부터 1930년 우써사건 발발까지를 다루며, 하편 《彩虹橋》는 원주민 연합군의 우써 초등학교 공격 이후의 일본과의 항쟁을 다룬다.  아타얄족 전설에 무지개 다리(彩虹橋)를 건너면 조상들의 영혼들이 있고 비옥한 사냥터가 있다고 한다.  이 봉기는 총 3주간 지속되어 총 50일간 저항이 계속 되었으며,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약700 명의 아얄타족이 죽거나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그 학교에 한국인 교환학생이 나를 포함해 2명이었는데 둘이서 수업시간에 이런 질문을 하고 일본애들에게는 독도 알어, 독도 들어봤어 이렇게 물어대니 일본애들이 한국애들 무섭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빴던건 아니다. 그 때도 잘 지냈고 그 후에도 일본에서나 대만에서 만났고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다.

당시 기숙사에 살던 일문과 대만 아이가 리포트 쓴다고 남경 대학살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걸 본 한 일본 아이가 큰 충격에 빠졌었다. 그 아이는 그 사건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고 했다. 자기네 조상들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한지 몰랐다면서 슬퍼했었다. 그에 반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중국이 조작한거야라고 주장하는 일본 아이도 있었다. 그 때 룸메였던 일본 아이가 자기네 역사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대해 이건 사실이고 저건 거짓이고 진실은 이거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었으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다고 그래서 애들이 진짜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했었다. 부정하고 왜곡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예전에 호주 어학연수 시절이 생각난다. 어느 주말 외국인 친구들이랑 팝송, 한국 노래, 중국 노래, 일본 노래가 다 있는 노래방에 갔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라졌던 일본 아이가 오더니 연거푸 미안하다고 했다. 그 때 한국인들이 다수였고 그 아니는 약간 취해 있는 듯 했다. 당시 10살 정도 많던 아저씨였는데 자기가 일본에 있을땐 몰랐다고 갑자기 울면서 미안하다고 나중에는 무릎까지 꿇었다. 갑작스레 당한 일에 방 안 사람들은 다 당황해서 얼음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인기 드라마 《각시탈》과 대만 영화 《시디그 발레》를 보면서 또 한번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게 된다. 이미 지나간 역사라고 해서 그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년 간 일본 친구들을 만나고 접하면서 더이상 일본인을 미워하진 않는다. 다만 일본 정부를 미워할 뿐이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오랜 부정과 왜곡이 그 후손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일본 정부가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며 성숙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미래의 일본인들을 위해 더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 주저리 주저리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