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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중에 생각나서 정리하는 주역에 대한 내용..
주역과 오행술수의 결합은 바로 한대에 실현되었다.
그 이전에는 음양가와 오행가는 서로 다른 두개의 파로 분리되어 있었다.
주역의 원본에는 오로지 음양사상으로 일관되어 있고 오행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부터 이 두 유사한 이론을 융합해 보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하지만 당시의 초기에는 서로 이가 맞지 않아 까다롭고 어설펐지만 서한 연간에 이르러 상호 보완 작업을 거쳐 완전한 형태의 이론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렇듯 오행의 위치가 팔괘 안에서 정해지자 세상의 모든 것에 전부 대응할 수 있게 되었고, 게다가 천간과 지지를 더하여 역학의 철학 도식은 삼라만상을 전부 포괄하는 하나의 방대한 상수체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일하는 체계이다. 또한 주체와 객체가 서로 통일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바로 이 같은 체계의 형성이 주역의 독특한 사유 패턴을 조성한 것이다. 상수학은 서한에서 시작하여 동한까지 발전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들까지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이를 감응이라 주장했다.
그 결과 상수학에 대한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수, 당 시대에는 불교가 매우 번성했고 도가와 현학이 성행하여 유가는 심히 약화되어 유가 자신의 인재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송대에 이르러서야 유가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한 "이"학이 때맞추어 생성되었다. 이 이학은 중국 봉건 사회에 통치사상으로 칠백여 년 동안 성행하게 되었다. 모든 유명한 이학자들은 주역의 해석과 주석에 매달렸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을 멸하라는 이념이 그 시대의 이학자들의 기본 명제였다.
그러나 주역 연구의 두 번째 융성기는 역시 송대라고 말할 수 있다. 송대의 역은 주로 "도서파'의 출현으로 인해 발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로부터 전해온 한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에 황하에서 커다란 용마 한 마리가 뛰쳐나왔는데 그 용마의 잔등에 난 털들이 아름다운 소용돌이를 치며 꽃무늬를 이루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하도"라고 불렀고, 그 후 신령한 거북 한 마리가 중원 낙수에서 기어 나왔는데 그 거북의 등에 기이한 반점과 무늬들이 있어 그것을 "낙서"라고 불렀다 한다. 복희씨는 바로 이 두 도형에 표현된 철리를 근거해서 팔괘를 창조했다 한다.
하도와 낙서가 도대체 어떤 형태의 그림인지 역이 생긴 이후 근 천년 동안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송나라 초기에 화산에 은거해 있던 도사 진단이 뜻밖에도 완벽한 하도와 낙서를 가지고 나왔다. 또한 앞에서 언급되었던 태극도 등도 이시기에 출현했다. 이 도형들의 출현은 온통 세상을 뒤흔들었던 대사건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도형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구심이 싹튼 것도 사실이었다.
1977년 봄, 안휘성 부양 쌍고회 서한의 여음후묘에서 "태을구궁점반" 한 개를 발굴했다. 점반의 정면에 새겨 놓은 수에 관한 표시는 낙서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진단 등에 의해 제기된 하도와 낙서는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단의 자는 도남이고, 호는 희이이며 또 스스로를 부요자라 불렀는데, 이름과 호는 모두 장자의 "소요유"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름처럼 그에게 유유자적한 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년기에는 오대 말기의 험난한 동란을 겪어야 했고 과거 시험에 누차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로는 이름난 산으로 도사를 찾아 방황해야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동빈과 사귀어 친구가 되었다고 하며 또 일찍이 마의도자의 "정역심법"이란 비전을 얻어 그 이후부터 도가와 역학의 현묘한 학문세계에 탐닉하게 되면서 범부의 세상사에 초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터득했다는 잠자는 공법은 사실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역을 계산하며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 진희이가 바로 자미두수를 만든 사람이다.
하도를 보면 이는 1에서 10까지의 열 개의 숫자를 둘씩 상대적으로 사방과 중앙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주역의 계사 속의 숫자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시 낙서를 보면 1에서 9까지의 숫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특징으로 홀수는 바르게 놓여 있고 짝수는 비스듬히 놓여 있다. 신기한 것은 가로 세로, 대각선을 막론하고 세 개의 수를 더하면 그 합은 모두 15가 된다. 지금의 수학적 개념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숫자 퍼즐이다.
이와 같이 하도와 낙서는 문자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수리의 관계, 조화, 균형의 구조를 표현했고 또한 도형으로 철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주역의 사유체계와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도형이 나오자마자 많은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문자 없는 역, 선천의 학문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단의 제자들은 그 도형들을 음양오행과 결합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우주창생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주역의 기원"에서 그림으로 나타낸 주돈이의 "태극도"이다.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생겨나고, 태극이 운동하여 양이 생성되고, 운동의 극으로 인해 정지되며, 정지로부터 음이 생성된다. 이 음양의 두 기운이 교감하여 이로써 만물이 생성된다."
송대의 대유학자 주희는 그가 편찬한 "주역본의"의 권두에서 아예 하도와 낙서, 그리고 선천도를 전통적인 문왕팔괘도 앞에 배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이 주역의 시조라고 인정했다. 주희의 이같은 주장이 과연 오류를 근본부터 시정한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 송나라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주역의 천인합일사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객관적 법칙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도록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에는 인간은 단지 하늘의 의지에 따른 일종의 분풀이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학자들이 제시한 철리를 존숭하고 인간의 욕망을 멸하라에서는 아예 인간을 하늘과 대립시켜 버렸다. 역학의 하나의 커다란 분파로서 유교는 이렇게 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역의 끊임없이 생성되는 변화의 정신으로부터 차츰 멀어져갔다.
송나라 이후에도 역학은 계속 발전해 나가며 이름난 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강희, 건륭의 성세에 다시 한 번 역학 연구에 세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날로 피폐되고 쇠퇴해가는 봉건왕조와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나라 시대에 주역학자들은 송나라나 한나라의 역학에 아무런 새로운 견해나 연구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나 도교도 마찬가지로 예외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상황이 도사들로 하여금 위백양이나 진단, 갈홍처럼 자연의 오묘한 섭리나 우주의 진리에 심취, 탐구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을 제조해 바치거나 백성들에게 부적을 그려주거나 주문을 외어 액막이를 했고 풍수를 점치는 것으로써 음양오행의 법칙을 숙명론의 증빙으로 변이, 왜곡시켜 주역이 본래 가진 끊임없이 생성되는 변화의 정신을 상실시켜 갔다.
2) 주역과 오행이론
주역의 첫 장 제 1괘인 건괘가 용에 관한 묘사로 되어 있고 용의 성장과 변화를 비추어 인생과 우주의 섭리를 비유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주역이라는 대도의 원류에서 발생해온 중국문화가 확고한 용의 문화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중국민족은 용의 철학을 배우고 깨우치면서 중국문화와 문명을 창조해 왔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의 상형문자는 창갈이라 불리는 신에 의해 창제되었다고 한다. 그의 모습은 용과 흡사하고 여섯 개의 눈동자에서는 신비한 빛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가 상형문자를 창제할 때 천지가 요동을 치고 하늘에서는 비오듯 황금 곡식과 밤알이 쏟아졌으며 땅 밑에는 귀신과 혼령들이 처량한 소리를 내며 구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 여러 국가와 민족들의 탄생설화를 종합해 보더라도 이처럼 문자 창제의 설화가 거창하게 묘사된 예는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자란 단순히 말을 표상 하는 일종의 발음기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유달리 중국에서만 이처럼 두렵고 신비스럽게 만들어졌다.
고대 중국 민족이 이미 문자가 생성되기 이전에 팔괘를 기호로 삼는 무속신앙의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같은 도형 관과 문자 관을 이해할 수 있다. 팔괘에서 상은 신성한 것이고 현묘한 것이어서 그 상은 하늘의 의지와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같은 관념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문자의 형상을 감히 소홀히 취급할 수가 없었으며 문자를 단순히 발음기호로만 여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의 사고에서 동물 숭배사상인 토템이즘과 도형 숭배사상은 설명한 바와 같이 근간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음양의 이론과 오행의 이론은 이미 설명했듯이 음양이론에서 오행이론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이론으로 존속했으며 이것이 수, 당 시대에 이르러 융합된다는 점이다. 더욱 나아가서 음양이론에서 발전된 주역이론의 근간이 되는 하도와 낙서의 선천수와 후천수가 음양오행이론에 결합된다는 것이다.
오행설은 주역과 더불어 매우 오래된 자연구성학설이다. 그것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모두 금, 목, 수, 화, 토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상생상극하여 이루어졌고, 이 세상의 어느 사물이나 모두 오행의 한가지 이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다섯 요소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변화하는 요소인 것이다. 이는 음양의 관계처럼 시간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 오행을 사물을 구성하는 분자나 원자의 요소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이는 다섯 가지의 기의 흐름을 동시에 지칭한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목기의 생명력이 온 세상을 뒤덮기 때문이며 추운 겨울동안 죽은 듯이 숨어 있던 만물이 소생하는 것이요 여름이 되면 화기가 충천하여 땅의 수기와 함께 녹아 있던 양분을 끌어 올려 만물을 육성하게 하며 가을이 되면 금기가 왕성하여 하늘로 향하던 목기를 절제하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고 가을이 되면 수기 강해져 성장을 멈추게 하고 양분을 모두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로 이러한 오행의 작용이며 토기는 만물을 담는 그릇이기에 계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음양과 오행의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양이나 오행을 어떤 요소나 물질로서 파악하려 해서는 안되며 이는 단지 물건을 담는 그릇처럼 변화를 담는 그릇이요 복잡한 삼라만상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수천년의 세월을 통하여 고안해낸 사고의 틀인 것이다. 한나라 동중서의 예에서 보듯이 천인합인설을 천인감응설로 변화시키거나 무리하게 모든 현상을 죄다 음양오행의 틀에 가두려하거나 속된 판단이나 허황된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
목화토금수의 오행은 상호간에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가 도움을 주는 상생관계, 서로가 제약을 주는 상극관계, 서로간에 상생도 상극도 아닌 비화관계가 있다. 상생관계는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극관계는 금극목,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이다. 비화관계는 목과목, 금과금처럼 같은 오행간의 관계이다.
전국시대 이후 이 오행사상은 점차 팔괘의 체계와 결합되어 가면 시간의 단위와 세월의 단위체계에도 바로 이러한 음양오행의 이론이 적용되었다. 계절뿐만이 아니라 하루의 시간도 새벽이 시작되는 시점을 목기와 왕성한 인시로 시작하여 2시간 단위로 하루를 12개로 나누고 각각에 동물의 상징하는 글자를 사용한 점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토템이즘적인 사고 외에도 음양오행의 이론이 완성되어졌음을 의미하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음양오행을 근간으로 하는 사주추명을 설명할 때 자세히 설명하겠다.
다만 음양오행의 이론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잇는 매개체이며 상대성원리의 출현이전 까지는 서로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를 선인들은 이미 포괄했다는 점은 동양사상의 심오함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하늘의 기운의 흐름을 나타내는 천간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이고, 땅의 흐름을 나타내는 지지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이다. 그리고 이 천간과 지지는 고대 중국에서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단위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왜 천간이 열 개로 되어 있고 지지가 열두 개인지는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르다. 아무튼 그것들을 서로 교차 조합하여 60년을 한 주기로 구성했다.
음양과 오행의 이론이 합쳐져 10천간과 12지지를 만들면서 동양적 시간과 공간의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 줄인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는 것이 많다. 남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음양오행이론의 기원과 생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양오행의 올바른 이해이다. 이 음양이론에 기초한 중국최고의 명리학을 찾아 떠나는 것은 다만 자신의 미래를 엿보고자 함이 아니라 슬기롭게 미래에 대처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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